조부님은 태어난 고장에서 제일 똑똑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마을에서는 유지(有志) 역할을 하셨다.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셨고 남겨놓은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집안은 몰락했다. 아버지는 몰락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6.25동란을 겪은 후에 타지에서 직업군인이 되었다. 군악대에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제대 후에 미군부대와 워커힐에서 故이봉조氏와 함께 악단생활을 했다. 그 당시 공무원 월급의 몇배에 달하는 수입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노조 활동에 발을 딛고서 일체 취업이 금지되어 어쩔 수 없는 실업 상태에 들어갔다. 잘할 수 있고 좋아하던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장기간의 고통을 겪으며 결국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악기를 팔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폭압적인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아버지는 몰락한 집안에서 희망을 키웠으나 결국 그 가난을 면치 못했다. 나는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허가 마을을 이룬 곳이다. 그곳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냈다. 가난은 내게 결핍과 불편함을 주었고 나보다 잘사는 유복한 친구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 가난은 갖고 싶고, 입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게 한다. 더 잔인한 것은 하고 싶은 것을 체념하게 한다. 조부님이나 아버지와 같은 수재는 아니지만 공부에 조금은 관심이 있었다. 남들과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은 열망과 시기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포기하고 부유한 친구들과 결별하고 스스로 낮춰야 하는 비루함이 중요한 청년시기를 방황하게 하였다. 다행히 집안 형편이 조금씩 풀려서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에 뒤늦게 대학을 입학하고 나름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다.
가난함이 모든 이에게 비루함을 주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가난을 극복하고 보란 듯이 잘 사는 입지전적인 사람도 주위에 많이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가난을 대물림한다. 가난은 욕구불만을 통해 인성을 거칠게 하고 가진 재물을 온전히 관리하지 못하게 한다. 가난은 행복을 다독이지 못한다. 큰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학시절 예쁜 여자후배들이 나에게 다가왔지만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과 빠듯한 용돈으로 남들처럼 연예할 자신이 없었다. 지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4년 내내 대학 축제나 여행을 갈 수 없었다. 나에게 사치였고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돈 잘쓰는 친구나 선배들에게서 가끔 막걸리나 맥주를 얻어 먹는 것이 나에게는 낭만이고 추억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 어렵지 않게 직장을 얻었다. 온통 활황기에 접어든 탓에 대기업과 은행 등 다수의 곳에 합격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끝내고 보통수준의 삶에 접어들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한 셈이다. 고맙게도 나를 선택해준 직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뒤늦게 입학했던 대학 간판이 훌륭한 편이 아니었고 함께 입사한 동료직원들의 출신학교가 더 뛰어났고 집안도 좋아 보였다. 악착같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뒤처지고 진급에서 밀려날 것이 염려되었다. 그런 덕분에 상관들에게 인정받고 제때 진급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직장에서 출신학교별로 인사관리하는 관례가 있었고 그런 것들로 개인의 성과보다 앞서서 판단되어지는 불합리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것들이 매우 싫었고 불쾌했다. 좋은 학교 출신은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는 사례가 허다했다. 집안의 재력도 한 몫 했다. 재력이 좋은 집안일수록 영업실적이 월등히 좋았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의 도움은 지대했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결혼할 때도 많은 차이가 있다. 조그마한 연립주택 전셋집이냐 번듯한 아파트 자가이냐 여부가 인생의 큰 차이를 만든다.
명문학교 간판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굉장히 오랬동안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로인해 여유없고 성급하고 배려심 부족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여유없이 베풀지 않고 살아야만 부자가 되는걸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 그분들도 나처럼 각박하게 사셨을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가 나의 조급한 성격에 늘 하는 말이 있다. “차근차근 해도 되잖아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나중에 꼭 후회하잖아요.” 아내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 많은 실수를 반복했다. 아내의 조언은 마치 현인의 격언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자식들은 나보다 훌륭한 대학교 출신이다. 그걸로 나의 자존심이 약간 세워진 것은 사실이나 열등감을 말끔히 벗어날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무뎌지며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직장을 떠나온지 어느덧 20여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들로부터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주위에 여럿 있지만 그들로부터 역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차차 잊어버리고 마음에 묻고 가는 것 같다.
큰아들과 며느리와 작은아들을 보면 이들은 그늘이 없어 보인다. 자신감이 넘쳐보이고 당당해 보인다. 나의 결핍되고 욕구불만의 인생이 투영되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재정적 기초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은 앙금처럼 남아 있다. 젊은 그들이 앞으로 헤쳐 나가면서 나와 같은 콤플렉스를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라디오에서 김동규씨의 굵은 저음의 바리톤으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려온다. 나도 인생의 10월 즈음에 다가선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먹고 살만하고 앞으로도 조금씩 벌 것이다. 이제는 남과 비교하지 않는 내 본연의 평안한 삶이 되도록 해야겠다. 이제는 남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거야 시월의 어느멋진 날에...
군생활의 회한(悔恨)
작성자 :
2024. 10. 18 (19:58)
87년 여름 한낮에 강원도 홍천에 자리잡고 있는 OO부대로 향하는 군용버스를 탔다. 소위계급장이 양 어깨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행색은 군기잡힌 이등병처럼 어색했었다. 상급부대에서 간단한 요식행위를 끝내자 각 예하부대의 인사장교들과 보급관들이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쓸만한(?) 신입소위들을 골라내서 땅따먹기 하듯 조율하여 대여섯명씩 자기 부대로 뽑아놓는 것이 우리들 눈에도 빤히 보였다. 나는 운동 경력이 있어서 뽑혔다고 후일담으로 들었지만 실상 좋아하는 운동을 “권투”라고 기재했을 뿐인데 복싱선수 출신으로 탈바꿈되어 운동을 잘하는 소대장으로 뽑힌 케이스이다.
인사장교의 탁월한(?) 수완 덕에 개성 강하고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나를 포함한 6명의 신입소위들이 의기투합하여 자대배치 장소로 이동했으나 대대 전체가 훈련중이라 부대가 텅텅 비워 있었다. 신입소위로서 패기를 보여주기 위해 위병소 군기를 단단히 잡아주고 부대에 잔류한 제대말년 병장들에게 위세를 부려 보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것 같았다. 부대원들도 신입소위들이 의례히 해야하는 그런 통과의례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괜한 생트집을 잡아서 얼차려 시킨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신입소위들에게는 또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장교들의 인수인계식을 빙자한 군기잡는 전통이었다. 나름 환영의 의미가 있었지만 얼차려와 폭력이 난무한 “한딱까리” 후에 사발로 소주를 받아 마시는 난폭한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 때 전역을 앞둔 전임 소대장이자 나와 바톤터치를 하게된 선배장교로부터 당부의 말을 듣게 되었다. 같은 출신이 아닌 중대장과 각을 세우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같은 출신 장교에게만 충성하고 타출신은 무시하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당부를 잘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결과 소속 중대장이 나를 좋게 봐줄리 만무였다. 중대장 뿐만 아니라 부대 내의 나이가 엇비슷한 타출신 선배장교들에게도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고 비하하는 등 무례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러나 타출신인 대대장님은 소대장들의 치졸한 행동을 알고도 지켜보며 묵인할 만큼 인내심이 많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다.
요즘 군은 이러한 행동 자체가 용납이 돼서는 않되지만 과거에는 출신 장교들 간에 기싸움하고 계급간에 하극상이 일어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 외 군생활을 성실히 수행한 결과 사단 전체 신임 소대장 교육을 맡아 선배 소대장으로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여러 출신의 장교들 앞에서 출신별 장단점과 처세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교육생들이 나와 같은 출신인 것으로 착각하여 금기시 해야하는 출신 간의 문제를 공적인 교육장소에서 떠들어 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지났는데 대대장님께서 사단으로 불려가 경고 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억난다. 거기에 대해 대대장님께서는 나에게 짧게 주의를 주셨고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전도유망한 대대장님께 너무 죄송했었다. 같은 출신 장교도 아닌 못난 부하를 특별히 지지해주고 다독여주신 대대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후로 출신과 관계없이 잘 지내려는 결심으로 선임소대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중대장이 부임하면서 훈련기간 중에 문제가 터졌다. 무박 야간 장거리행군을 무사히 끝마치고 일등으로 복귀한 자리에서 중대장의 이해할 수 없는 돌발행동이 문제가 되었다. 소대장을 포함해서 전체 얼차려를 주겠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단순히 군기가 빠져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소대장을 포함해서 군기를 다잡아보겠다는 심산인데 병 앞에서 장교를 혼내지 않는 장교들간의 불문율과 어긋나서 나는 끝까지 얼차려를 받지 않고 버텼다. 중대장은 나를 지시불이행과 명령불복종으로 처리했고 그후 그림자 취급하는 등 점점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이런 문제가 연대장 귀에 들어가서 견책과 감봉, 타부대 전출조치를 받았다. 그 연대장과 중대장은 같은 출신이다. 선민의식으로 똘똘뭉친 그들에게 감히 고개를 쳐든 타출신 소대장 한명쯤 혼내주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별탈없이 밤새 행군하여 잘 복귀한 병사들에게 싸이코처럼 버럭 화를 내는 중대장을 막아선 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당시 견책을 결정한 상벌위원회의 한 참모가 나에게 질문했다. “전시에 중대장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나는 답변했다. “목숨을 걸 수 있다. 그러나 목숨을 걸만 한 중대장에 한해서다.”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은 셈이다.
전출 직전에 대대장님과 마지막 면담을 했다. “대대참모로 더 데리고 싶은데 전출보내게 되어 할말이 없다. 내 힘이 미치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 전출지 대대장님께 잘 말을 해놓겠다.” 끝까지 나를 믿고 지지해 주시는 대대장님께 죄송하고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소대원들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받고, 동료의 배웅을 끝으로 타 부대로 불명예스럽게 전출되었다.
지나간 군생활에서 보람보다는 후회와 반성이 많이 남는다. 하나의 장교단으로 똘똘 뭉쳐야 하는데 타출신에 대한 잘못된 배타성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타출신장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려서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소대장을 믿고 의지했던 소대원과 분대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갑자기 전출하게된 소대장을 황당하게 여겼을 터이다. 함께 전입했던 5명 동료들에게 위로의 말을 듣지 못했으나 그들의 무관심에 섭섭할 만큼 당당하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는 동료 소대장과 거리두기였을 것으로 이해한다.
불명예스럽게 전출하게된 동료 장교의 따블백을 대신 짊어지고 따뜻한 식사대접으로 전송해준 생각지도 못한 동료장교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분대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창의 혈기로 분대장에게 심한 체벌을 했었는데(분대원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해야 분대장의 명예와 체면을 세워줄 수 있다) 그 분대장이 소대원 전체를 이끌고 위병소 앞까지 나와 전송해주었다. 단체경례를 받는 순간 더없이 미안하고 그 간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제대할 때까지 동고동락했어야 했는데 끝까지 같이 못해서 미안하다.
끝으로 김윤호 대대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부하를 인정하고 지지해주고 믿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마도 전시였다면 대대장님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이제는 칠십대 후반의 연세이실텐데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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