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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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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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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9. 0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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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링링이 한반도 쪽으로 진입하면서 사무실 창밖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고 있습니다. 잔뜩 흐린 날씨와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해줍니다. 어둠이 깔린 듯한 오후에 커피 냄새까지 은은히 풍기면 지나간 추억들이 상념(想念)으로 점점 다가옵니다.
70년대 저는 여느 평범한 중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을 감안해서 일찌감치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특했지만 그 때는 철이 든 것처럼 스스로 장래를 정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저뿐만 아니라 또래들도 대부분이 터무니없는 꿈을 꾸지 않았고 그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장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가까운 이웃의 형이 한양공고(한양공업고등학교) 졸업생이었습니다. 영민하고 재주가 많았던 그 형의 영향을 받아 그 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 때는 전기(1차) 지망이 실업계이고 후기(2차)가 인문계 지망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를 실업계 고등학교 교정에 기념비처럼 세워놓고 기술인 양성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중동붐으로 건설경기가 한창 좋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중학교 성적이 조금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연합고사를 생각보다 잘 보았는지 덜컥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는 걱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성적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형편이 어렵더라도 대학을 목표로 인문계로 보내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입학식때 천여명에 이르는 신입생들의 대표로 선서하고 3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된 것 같아 매우 기뻤습니다. 그 당시 건축과 선생님들은 기계과나 전기, 전자과를 제치고 건축과에서 수석입학생이 나와서 매우 기쁘게 여겼습니다.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고 학급반장으로 선정되었지만 중학교와 달리 황량한 학교 분위기와 아이들의 거친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무렵의 일입니다. 같은 반 친구였던 두 녀석이 장난을 치며 교탁을 조금 훼손하는 모습을 지나가는 선생님이 발견했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두 녀석을 혼내다가 그 문제를 교권 침해로 확대하여 결국 두 녀석을 퇴학 처리했습니다. 학급 반장인 저로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아이들 장난을 침소봉대하여 최악의 조치를 취하는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절친했던 친구 두명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습니다. 교무실에서는 그까짓 놈들 퇴학처분하면 한명당 60만원을 받고 전학생을 받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교권 침해 운운할 정도로 존경받아야할 선생님은 한분도 계시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두 친구와 함께 눈물로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반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교장실로 가서 호소문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교장선생님의 화난 얼굴과 담임선생님의 당황스런 얼굴이 겹쳐 떠오릅니다.
학생 때 존경할 만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일대의 중대한 기회이자 축복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교무실에 앉아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속물처럼 보였고 커다란 상실감으로 선생님들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었습니다. 교실 뒷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술, 담배를 배웠고 그 때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때는 교내 흡연으로 교련선생님에게 걸려서 정학을 당하고 순화교육 대상자도 될 수 있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모범생에서 문제생으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들이 겸손과 순종보다는 반항과 교만의 심성으로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아직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 겸손해지고 순종해지도록 매순간 노력하지 않으면 반항심과 교만이 불쑥 솟아납니다. 만약 그 시절에 친구들을 잃은 충격을 털어내고 선생님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참고 견디어 냈다면 지금의 인생은 좀 더 나아졌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반문해 보지만 그 시절을 겪어내며 또다른 경험을 통해서 지금의 자리가 있지 않았는가 스스로 위안을 해봅니다.
고등학교 동창모임에 뒤늦게 참여했습니다. 저와는 달리 친구들은 격변의 고교시절을 묵묵히 참고 견디어 저마다 훌륭하게 자리매김하여 30여년 만에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동안(童顔)은 아니지만 한층 공고(鞏固)해지고 세련된 얼굴이어서 편하게 대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학급반장으로서 모범적이지 못한 부채의식 때문에 초대 동창회장직을 기꺼이 맡게 된 점도 있었습니다. 4년여 동안 회장직을 수행해오다가 연말에 회장직을 내려놓기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생각되지 않고 여전히 갚아야할 빚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소중했던 그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낸 아쉬움 같은 것이 뇌리에 남아 있나 봅니다.
바깥에는 비가 잦아들고 있습니다. 어느덧 상념도 잦아들고 당장의 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세월이 순식간에 40년을 지나 왔습니다. 그 당시의 교장선생님은 돌아가셨을 테고 담임선생님은 정정하다고 들었지만, 그 당시 퇴학당했던 두 친구들의 얼굴은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들의 소식은 여전히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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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의 골든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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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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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7. 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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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이라는 인물을 TV에서 접한 것은 아덴만에서의 석해균 선장의 영웅담과 함께 날카로운 인상의 깡마른 얼굴이었다. 말투가 단정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생명을 책임지려는 진정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인 중증외상 분야의 실력자로 소개되었고 반신반의했던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초주검이 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어 국민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지간한 의사라도 생존 가능성이 확인되지 않고 국민적 관심을 받는 특별한 환자를 구하러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그 모든 부담을 딛고 기꺼이 이억만리에 다녀온 그는 석해균 선장 못지 않는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 서서히 잊혀져 갔던 그는 국내 중증외상센터의 열악한 환경과 처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위급한 환자들을 살리는 일을 계속해왔으나 정부의 무관심과 일부 의료계의 질시와 모략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피곤해 찌든 얼굴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어려운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찌할 바 모르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커다란 문제로 보였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한 친구가 “이국종의 골든아워”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해 왔다. 일년에 두어 번 책을 사다 보는 것이 연례행사인 나로서는 꽤 두껍게 보이는 상하 두 권의 책이 버거워 보여 망설였으나 이국종에 대한 관심을 그의 글을 통해서 공감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구매하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내내 절박한 현실적 문제에 처한 그의 어려움에 답답한 심정이었고 의료진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새삼 갖게 되었다. 그 책을 소개한 친구의 말대로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긴박한 글들이 가득했고 일류간판이 아닌 이류, 삼류가 능력과 관계없이 버텨내기 어려운 국내 환경에 공감하면서 제법 두꺼운 책 두 권을 순식간에 독파했다.
비단 의료환경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뿌리내인 차별, 편견, 부정부패, 무능, 부조리… 이런 폐단들이 곧 적폐이며 공공의 적(敵)일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는 인색하고 오히려 모략하고 매장하려는 모리배(謀利輩)들은 암적인 존재이며 그런 자들이 발 디딜 틈이 없어야 진정한 사람 살 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증외상 및 응급의료계에 헌신하고 계시는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를 비롯한 모든 분들의 숭고한 사명감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분들 덕분에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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