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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를 받아들여라
작성자 : 2022. 03. 14 (14:15)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이치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의 반대말인 조리(條理)는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세상의 모든 사람이나 일이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부조리한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상은 조리 있게 바뀌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부르짖습니다. 또 하나의 부류는 세상이 으레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바라는 대로 세상이 변화했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평과 분노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납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다고 하며 남을 헐뜯고 지적질을 서슴지 않습니다. 평소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품습니다. 자신의 소견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를 적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정치권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정치가는 국민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협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매사 흑백 논리로 세상을 편가르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도무지 없습니다. 상대가 부조리한 방법을 사용하면 참지 못합니다. 상대편이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뭔가를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생각하면 부조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 철학을 이끌었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부조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늙어갔습니다. 젊을 때 보다 나이 들면 부조리를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쉬워집니다. 폭넓은 시야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부조리에 쉽게 반응하며 저항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의 경험과 함께 지혜의 문이 차츰 열리며 시야가 넓어집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안목이 심하게 좁아져서 부조리에 우스꽝스럽게 반응하며 스타일을 구깁니다. 항상 세상은 부조리하다는 전제를 깔고 세상을 바라보면 눈과 마음이 훨씬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면 융통성이 생깁니다. 여유가 생겨 매사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혼자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적응하며 살려고 애를 씁니다. 타협도 힘이 없으면 못합니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면 세상의 이치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과거를 받아들이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구와 욕구는 다릅니다. 흔히 우리는 요구에 너무 치중해서 그 너머 있는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깊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모든 부조리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자신은 항상 옳고 합리적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착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상대의 욕구가 마음의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조리를 만나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조리냐 아니냐라는 판단조차 상당 부분이 주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는 만나면 조심스럽게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출처 : 정은상의 맥아더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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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단과 오인방(五人幇)
작성자 : 2022. 03. 01 (15:19)
대학 1학년 여름 무렵에 학군단 입단(入團)을 위한 체력검사를 받았습니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하얀색 단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선배님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목에서 피 맛이 나도록 운동장을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차피 군대에 갈 바에는 장교로 가는 게 폼나고 전역 후에도 취업이 잘된다는 친구들 권유를 받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교에 대한 포부는 애초부터 없었고 어떠한 각오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되어도 까까머리에 교련복입고 로봇처럼 팔을 휘두르며 “충성” 구호를 부르짖는 1년차 후보생들을 “바보티씨”라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과 2학년 시절이 꿈처럼 지나갔고 나름대로 학업에 매진한 결과 무사히 학군단 입단이 최종 확정되어 “바보티씨”로서 탈바꿈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일제때부터 시작된 군대문화의 악습이 육군사관학교로 이어졌고 육사출신 훈육관들은 학군단 후보생들에게 그 구태를 고스란히 물려주었습니다. 선후배간의 사적 제재(制裁)가 구태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군기확립이라는 명분으로 공적인 관리체제를 벗어난 사적인 체벌을 암암리에 부추기어 군조직을 손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였고 고참은 신참에게 과거로부터 받아온 온갖 불법부당한 제재를 가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비단 학군단과 같은 군대 조직뿐만 아니라 학교, 회사, 단체 등 여러분야에서 선후배간의 사적제재가 일반화되었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오인방(五人幇)은 탈출구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보다 애때 보이는 선배들로부터 은밀한 곳에서 구타당하고 고문과 같은 얼차려를 반복함으로써 정말이지 바보가 되기를 바라는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맞서서 대들거나 오인방이라는 조직에 가입하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무서웠던 덩치 큰 선배의 권유로 기꺼이 오인방에 가입했습니다. 오인방의 태동은 저보다 몇기수 위의 선배님 5명이 후보생시절 친교의 일환으로 단과대를 벗어난 사적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이 오인방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모택동 사후 사인방이 회자되어 5명을 편의상 오인방으로 명명했고 개성이 남다른 5명의 돈독한 우의를 이어가기 위해 다음 기수의 개성이 튀는 후배들을 선발해왔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오인방 선배들의 비호 덕택에 여타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덜 받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적제재를 사적모임으로 모면하려는 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오인방의 명맥이 계속 이어지고 오인방 멤버들이 학군단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견제하고 시기하는 선배와 동기들, 후배들로 인해 좋지않은 풍문들을 듣게 되었으나 오인방 멤버 대부분은 이런 사실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의 하나회같은 군내 사조직이 아니며 소속 학군단에 누를 끼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선후배간의 친목단체로써 40여년간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학군단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군단에서 여러기수를 아울러 40여년 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오직 오인방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같은 단과대에 소속된 동기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한 것과 저로 인해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더 받게 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을 부침없이 순수한 선후배모임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쌓고 있는 점을 부디 오해없이 바라봐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오인방은 오래전에 그 명맥이 끊어졌고 학군단 내의 사적제재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또한 후보생에 대해 불합리했던 처우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복무기간이 36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되는 동안 학군장교의 복무기간은 변함이 없었고 출생률도 점차 낮아져서 학군단 입단 경쟁률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특단의 대처가 없으면 장교 양성의 산실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리라 염려하는 말씀들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제 자식들보다도 어린 후배들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엊그제 우리기수 오인방 5명이 환갑의 나이에 모처럼 모였습니다. 개성이 강한 5명이 완전체로 모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기꺼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 우의를 돈독히 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오인방을 통해 평생을 같이 하고 있는 친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질감을 갖고 있는 형님과 아우들이 동시대에 함께 건재하다는 사실에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오인방 처럼 오랜세월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지닌 친구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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